2009년 10월 03일
아씨와 머슴 3
뭐.. 이걸로 11월 서플에 카피본 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
박 봉구, 조선의 수도 한성에서 5대 째 비밀 인쇄소를 운영중인 명가의 자손. 조선 동인 업계의 없어선 안될 존재. 통칭 박 씨라고 불리는 봉구는 입이 찢어질 듯한 웃음을 터뜨리며 환호했다.
"낙원이 있다면 여기리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색감의 기화요초들이 천지사방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벌판이었다. 북으로 운무가 끼어 있는 신비로운 산이 보이고 남으로는 온갖 색들로 이루어진 지평선이 보이는 곳. 공기조차 달달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봉구는 당연히 해봤어야 할 '여긴 어디?'에 대한 의심과 탐구는 과감히 생략한 채 봄날 망아지 뛰놀 듯 벌판을 달렸다.
"호호탕탕 뛰어보자 넓은 들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보-옹구!'
호연지기가 절로 샘솟는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존자' 쯤은 발 아래로 둘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핏 자신의 글이 '읽는' 용도가 아니라 '암호와 해독, 그 난해함에 대한 증거'로 평가 받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쓸 수 있다! 조선 제일의 남애(男愛BL) 소설을! 사군자 따위 능욕해주겠어!' 그 근원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봉구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음하하하하-. 내가, 내가 건담(乾譚:하늘이 내린 이야기)이다!"
건담이라면 존자 보다 급이 높은 것이 분명하리라. 봉구는 자신의 기지에 흡족해 하며 다시 한 번 크게 웃고 들판을 내달렸다. 때마침 어디선가 나타난 사슴, 토끼, 여우 기타등등 온갖 축생들이 봉구와 함께 울부짖으며 그와 진로를 나란히 했다. 완벽한 천지합일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봉구는 크게 기꺼워 하며 축생들을 환영하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러니까 두 팔을 좌우로 뻗어 파닥거렸다는 말이다. 축생들 역시 그에 응답하듯 취향껏, 능력껏 환호했다. 그러나 봉구는 그 축생들의 환호틈으로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이명과도 같은 불쾌함이었다. 마치….
"된장국 먹는데 똥 싸는 이야길 들은 기분인데? 누구냐. 뭐지?"
봉구는 다채롭게 짖고, 울고 있는 축생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멍냥짹꽥어흥' 마치 새벽의 도래를 막기 위해 밤을 찬양했다던 전설속의 축생 합창단인 '부래매(不來昧:새벽이 오지 않는다.)합창단'을 연상시키는 소음이었다.
"응?"
다시 '멍냥짹꽥어흥'. …멍? 봉구가 이를 갈아붙히며 축생들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다. 황구, 누렁이. 그러니까 누런 털을 가진 개.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봉구는 두 팔을 걷어붙히며 축생들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 누렁이를 들어올렸다. 눈 높이 까지 들어올려진 누렁이의 표정은 '아니, 이 사람 새끼가?!' 라고 준엄하게 짖고 있는 듯 해서 봉구의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다짜고짜 욕을 뱉어버리기엔 건담이라는 본인의 호가 주는 격이 아까웠다. 봉구는 짐짓 근엄한 어투로 타박하듯 말했다.
"시발, 된장국에 밥 한사발 말아서 시원하게 쳐드시는 본인 앞에서 똥 이야기 한게 똥색 누렁이었단 말이지. 이런 개 같…아니, 이런 개새끼를 보았나."
'건담 박 봉구'가 아니라 '인쇄소 박' 이었다면 '이런 시발.' 걸죽하게 욕 한마디 뱉으며 발길질을 했으리라. 사람은 역시 격에 맞게 살아야 한다. 봉구는 스스로 감탄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 때문에 '이 사람 새끼가?!' 라는 눈빛에서 '문다, 물어죽인다!' 라는 눈빛으로 바뀌어버린 누렁이의 주둥이가 급속한 속도로 가까워 지고 있는 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서 개와 사람의 격렬한 입맞춤이 이루어졌다.
"끄악, 누렁이 이 개새…헉. 시발, 꿈?"
*
기화요초도, 건담 박 봉구를 칭송하는 축생들도 없었다. 봉구가 눈을 떴을 때 남은 것이라곤 비릿한 피 냄새와 안면이 통째로 불에 타는 듯한 끔찍한 고통 뿐이었다. 봉구는 후자에 집중하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나 죽는다!"
봉구가 기절에서 깨어난 심정을 다채로운 행위 - 안면을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튀어나온 돌에 옆구리를 찔리고 꽥 하는 비명을 추가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돌부리를 걷어 차다가 발목이 돌아가는 - 로 풀어내는 것을 복잡한 심사로 바라보던 춘봉은 곧 한숨을 쉬며 품에서 연초 주머니를 꺼내 단죽에 채워넣기 시작했다. 정체 불명의 여인에게 농락 당하듯 두들겨 맞은 상태인지라 소소한 동작에도 온몸이 욱씬거렸다. 사부에게 수련받던 시절 이후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누군가 '여자에게 맞아서?'라고 물어온다면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네' 라는 눈으로 봐줄 수 있을 것이다. 일신에 무(武)의 정수를 담고 있는 자라면 무인 일 뿐,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무인으로서 무인에게 압도적으로 당했다는 사실이 주는 우울감과 분노일 뿐이었다.
춘봉은 터진 입술 사이로 단죽을 밀어넣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쓰디 쓴 연초 연기가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넘어간다. 몇 모금 더 연기를 몸 속으로 밀어넣은 후 춘봉은 단죽을 손에 쥐고 내려다 보았다. 변명하자면 이것이 패배의 원인이리라. 무인에게 몸은 재산이다. 제 돈 주고 몸을 축내는 이런 것을 가까이 했으니 퍽이나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춘봉은 한 번 더 단죽을 입에 물어 연기를 빨아낸 뒤 그것을 꺾어버렸다. '와직' 하고 제법 비싼 고급의 단죽이 반으로 부러져나갔다. 춘봉은 부러진 단죽과 연초 주머니를 한켠으로 집어던진 후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 옆구리, 발목 사이에서 방황하며 울고 있는 봉구를 내려다보았다. 저렇게나 아파하는 것이니 보는 입장에서 측은지심이 생길만도 하건만 춘봉은 짜증만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프기로 따지자면 춘봉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했다. 눈 큰 여인의 손속은 맵다 못해 우주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모르긴 몰라도 보름은 정양해야 할 것이다. 춘봉은 품에서 구겨진 원고 뭉치를 꺼내 봉구의 곁에 툭 떨어트리며 말했다.
"원고 여기 있소. 나 먼저 내려가리다. 너무 늦으면 내려가기 힘들테니 적당히 하시오."
춘봉은 애처로운 봉구의 시선을 외면하며 발걸음을 옮겨 지게를 짊어졌다. 아픈 몸에 묵직함이 더해지자 집까지의 여정이 귀가에서 고난으로 격상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게를 버리고 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으나 이내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게 없이 맨몸으로 돌아온다면 아씨는 단호하게 다시 한 번 산에 다녀오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더러운 팔자. 바쁘지 않을 것 같아 수락한 제의였는데. 적당히 몸 좀 움직이고 세경 받으며 게으름 피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미쳤지. 망령난 노인네한테 비격술이랍시고 배우게 됐을 때 부터 편한 삶이란 없을거란걸 알았어야 했는데. 춘봉은 하늘을 우러러 죽은 아씨의 오라비를 저주함과 동시에 자신을 위로하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체중이 실릴 때마다 아우성치는 하체가 서글펐다. 그러나 어쨌든 멈춰있을 순 없었다. 집이 춘봉에게 올 순 없는 노릇아닌가. 다시 한 번 '비격문 32대 전승자 김 춘봉'과 '몰락 가문의 친우가 목숨걸고 한 부탁에 낚여버린 머슴 김 춘봉' 양자를 아는 모두를 저주하며 힘겹게 몇 걸음 걸어 나갔다. 그때 어디선가 '이보게 괴인 봉, 아니, 춘봉. 나 좀 데려가 주게.' 라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낯익은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춘봉은 뒷끝없는 호쾌한 사내답게 깨끗이 무시했다. 몸이 아프니 환청이 들리는게지.
봉구는 단호하게 멀어지는 춘봉의 뒷태가 참으로 얄밉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을 고양시키는 존자의 원고를 움켜쥐며 기어이 한 마디 뱉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라질 놈. 내가 기절한 사이에, 응? 내가 왜 기절한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봉구는 멀어지는 춘봉의 뒷태를 의심스럽다는 듯 노려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바지춤을 살펴보았다. 허리띠의 매듭은 자신이 묶어둔 그대로였다.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이내 피해망상적인 걱정이 휘몰아쳐왔다.
"저 놈이 미리 내 허리띠의 매듭을 유심히 봐둔거라면? 분명 존자의 심부름 꾼이니 남색의 달인일 것이다. 오, 신령님."
이쯤되니 안면과 옆구리와 발목의 통증은 문제도 아니었다. 정조란 중요한 것이니까. 봉구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엉덩이를 만져 본다던지, 의식을 집중해 통증의 여부를 느껴본다던지 해보았다. 그리고 봉구는 우려하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한 일 없다면 나오는 것들만 이용해야 하는 일방 통행문에 미미한 통증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봉구는 존자의 연재 중단 선언을 들은 것 처럼 서글피 울었다.
"아뿔싸! 아프다! 아파! 이놈이 나를! 그래서 저 놈 옷이 저렇게 엉망이…, 나를 안고 뒹구느라고…, 아이고 아버지!"
봉구가 기절하는 중에 절묘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돌조각에 찍힌 것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리 없었다. 아팠을 당사자야 이미 세상과 단절된 상태였으며 목격자일 수 있었던 한쌍의 남녀는 상대의 몸에 손이나 발을 꽂아 넣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 이 의심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봉구는 상실한 정조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울부짖었다. 어떻게 지켜온 순..아니, 이건 아니다. 어쨌든 미묘한 상실감이 휘몰아쳐오고 있었다. 봉구가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오해로 분노하며 저주와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동안, 제법 멀어진 춘봉은 귀를 후비고 있었다.
"마지막에 맞았던 째차기에 귀를 다친겐가. 쯧. 그나저나 저 놈은 왜 저리 울고 지랄이야."
# by | 2009/10/03 23:26 | 끄적끄적 | 트랙백 | 덧글(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어디세요?ㅎㅎㅎ
내 자린 아니고.. 지인의 지인이 서플에 부스 할당받았다는데
저거 읽어보고 카피본 할 생각없냐고 제의해와서요'ㅅ'
카피본 하겠다고 하면 대행해주겠다고 해서.. 고민중임. ㅎㅎ
사실상 독설을 가르친건 옌님 아닌가요!!!!!
난 그정도로 련약하게 크지 않았음!!!
머엉.